지리산 순두류 생태탐방로. 연이어 세 번째 이곳을 찾는다. 법계사까지만 갔다 왔기 때문에 뭔가 부족했다는 느낌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 산에 대하여 생각을 하던 중 이곳을 찾는다는 생각은 단번에 굳어졌다. 뭐라고 할까. 타이밍!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는 시간이 맞아진 시점.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바깥을 나갔다 들어왔고, 다시 잠을 청하다 여섯 시에 일어나 산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어디를 가야 하나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여덟시 삼십분에 준비가 끝나자 바로 마음을 굳혔다. 올해는 기필코 눈 쌓인 천왕봉을 보겠다고.
계획한 구간은 순두류 – 로타리대피소(법계사) – 천왕봉 – 제석봉 – 장터목 – 유암폭포 – 칼바위 – 중산리, 총 12km 정도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약 10분 정도의 차이로 천왕봉은 포기해야 한다. 겨울날씨의 특성상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서둘러야하는 것과 아직도 믿지 못하는 나의 다리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법계사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타야만 했고, 그로 인하여 산행 일정에 있어서 약 1시간 정도의 시간을 버는 것이다. 두류동에서 10시에 출발하는 버스시간표에 맞춰간다면 의령에서는 9시 이전에 출발해야하고 두류동에는 적어도 10시 10분전에 도착하여 대비해야한다. 버스시간에 늦게 도착하게 되면 다음 버스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할 것이고, 아니면 칼바위 방향으로 걸어야 할 형편이다.
물을 두 병 사서 배낭에 넣고 의령에서 출발한 시간은 8시 44분. 적당한 시간이다. 여유롭게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버스 승강장을 보니 버스가 막 떠나고 있었다. 10시가 되기 전인데도 만차가 되어 떠나버렸다.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간과 관계없이 계속 운행한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정해져 있는 시간표를 맞춰야 할 것이고 차량 운행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0시 5분쯤 버스가 출발했다. 자연휴양림 승강장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15분.
보통은 천왕봉을 가고자할 때는 일주일 전부터 계획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가 법계사 운행버스 시간표에 맞춰 장소를 결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어떻게 되었든 일찍 일어났고 집에서 나서도 되는 시간이 여덟시 삼십분이라는 것은 천운은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천왕봉을 찾고자하는 마음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길들여져 있는 나는 늘 늦게 출발했고, 여름이 되어서야 겨우 천왕봉을 꿈꾸었으므로 흰 눈이 쌓여 있는 천왕봉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룰 수 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생각나는데 눈 쌓인 천왕봉을 너무도 간절히 생각했기에 이루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0시 15분 생태탐방로 통문을 통과해 산으로 접어들었다. 익숙해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산을 만나는 나의 눈은 항상 산의 모습을 새롭게 받아들인다. 포장도로가 연결된 도시를 걷는 것보다 산길을 걷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안겨준다. 사계절이 다르고 기온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또 오전과 오후라는 시간의 차이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변하니 산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할 문장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개선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눈길이 시작된다. 그동안 위태위태했던 길에서 아이젠을 착용하면 별 무리 없이 길을 걷게 된다. 돌길이 나타나면 쇠와 돌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울리고, 어느새 눈길이 나타나면 다시 뽀드득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개선문에서 천왕봉까지는 800m. 마지막 오름이 남았다. 간절히 원했던 눈 덮인 천왕봉이 지척에 있다. 언젠가 마누라가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다른 모든 것에는 관심 없이 시큰둥하다가 산에 가는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인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왕봉을 찾아보지 못했다. 버스로 네 시간을 타고 가서 산길을 걷고 다시 버스로 네 시간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 산보다 의령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산 아래에 도착할 수 있는 곳. 언젠가 지인들과 함께 지리산만 찾아야겠다는 이야기를 했었건만, 결코 실현되지 않는 일이고 일 년에 두세 번 혼자서 지리산을 찾는다. 지리산이 그렇게 멀지는 않는데도 쉽게 찾지는 못한다. 어쩌면 지리산이라는 산이 내뿜는 위압감이랄까. 그 힘에 주눅이 들어서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다.
맑은 날 의령의 자굴산에 오르면 멀리 지리산의 모습이 다가온다. 특히 눈을 이고 있을 때는 손에 잡힐 듯 흰 산이 가까이 다가온다. 의령에서는 승용차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가야산, 모산재, 황매산, 화왕산, 둔철산, 여항산, 연화산 등이다. 그와 함께 지리산도 가까운 곳에 있다. 최근 지리산에 접했던 곳은 노고단, 뱀사골, 한신계곡, 백무동계곡, 거림계곡, 피아골 등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은 백무동이다. 백무동에서는 세석과 장터목을 골라서 갈 수 있다. 눈이 많이 내린 한겨울에 세석 길은 통제되고 장터목 길은 열려있다.
천왕봉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22분. 수많은 사람들이 천왕봉 표지석에 몰려있다. 천왕봉 표지석 뒤쪽에는 “韓國人의 氣象 여기에서 發源되다”라는 글귀가 음각(陰刻) 되어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 갑자기 나타나 먼저 사진을 찍고 가는 사람,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 등등 온갖 사람들이 천왕봉 표지석과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다 흩어졌다. 사실 천왕봉을 오르도록 흥미를 유발시킨 것 중의 하나는 돌에 새겨진 그 많은 글자 중에 천주라는 글자를 찾는 것이었다. 天柱는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괴고 있다는 상상의 기둥이다. 그 기둥, 아니 글자가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지 않으면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심정. 많은 사람들과 정보를 주고받지 못하고 혼자서 산을 다니니 알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 그저 장난으로 천왕봉을 다녀간 기념으로 새긴 글자는 많이 보았는데 天柱라는 글자는 보지 못했다. 天柱라는 글자를 찾아서 이쪽저쪽을 헤매다보니 그 옛날에 새겨진 듯한 글자들을 많이도 발견했다. 도저히 사람이 서서 새기지 못할 장소에까지 글자들은 들어서 있었다. 사람의 이름에서부터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담은 듯한 글자까지 그렇게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리산이 하늘을 괴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땅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릴 염려는 없겠다. 산의 먼 북쪽에서는 시커먼 구름이 산허리를 쓸고 지나가고 가까운 곳은 눈부신 눈으로 덮여 별천지를 이룬다.
눈은 하늘의 색깔을 닮아 푸른빛이 감돌고 나무마다 눈을 움켜지고 바람에 떨고 있다. 바람도 그 여린 나뭇가지에 맺힌 눈꽃을 어찌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바람이 매섭게 얼굴에 부딪쳐오고 굳은 혀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상 서쪽바위에 새겨진 천주(天柱) 희미해서 분간하기 어렵다. 손으로 더듬어보면 글자의 윤곽이 손끝을 통하여 들어온다.
천왕봉을 뒤에 두고 장터목으로 향한다. 천왕봉에서 제석봉 구간은 온통 눈세상이다. 고사목 군락지로 알려졌던 제석봉은 이제 어린 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곳에 있는 나무를 주목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구상나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많던 고사목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어린 나무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제석봉에서는 천왕봉을 배경으로 두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천왕봉에서는 구름 한 점 없었는데 제석봉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은 다시 구름에 휩싸여 봉우리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보라가 치는 형상으로 부옇게 흐려졌다.
장터목 대피소를 지나 본격적인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내려오는 길은 지루하고 멀다. 유암폭포에 이르러 잠시 쉬어 간다. 늦은 점심인지 남자 세 명이 유암폭포 아래에서 얼음 위에 자리를 깔고 식사를 하고 있다. 폭포를 뒤덮고 있는 얼음 아래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생각 없이 걷다보면 어느덧 칼바위에 도착하게 되고 잠시 걸어 내려가면 통천길을 빠져 나온다.
오후 3시 7분. 무사히 내려왔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찾아서 떠난 하루였다. 지척에 있으면서도 선뜻 마음을 내지 못했다. 하루에 다녀오기는 아주 먼 여정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올해 간절히 원했던 일을 성취했다. 뭔가 해야 할 일을 놔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 느낌을 지워버리는 일은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2016년의 산행은 한결 여유로운 산행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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