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은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정조 18년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2년 8개월 만인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는데
겨울에는 당상관 이상이나 할 수 있었던 귀마개를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한겨울을 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한여름에는 백성들의 건강을 생각하여
성 쌓기를 멈추라고 명령하였는데
오히려 백성들이 자처하여 성을 쌓았다고 한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성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되어 있다.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창룡문, 공심돈 등이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 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18세기의 과학과 건축, 예술을 살필 수 있는
우리나라 성곽건축 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방어기능과 성벽 안에 갖추어진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각기 다른 모양과 특성을 지닌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문화재단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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