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국의 시조, 이진아시왕
뇌질주일 또는 내진주지라고 한다.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형으로 서기 42년 대가야국을 건국하였다.
대가야는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꺼지 16대 520년의 역사를 누렸다.
가야국 시조의 어머니, 가야산신 정견모주
대가야 금관가야 시조의 어머니로 기야산신으로 숭앙되었다. 대가야 왕실세계의 최고 높은 위치에 자리하였으며 해인사에는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가 있었다.
가야의 전체적인 지도를 그려 놓았다.
이 지도를 보면 의령은 대가야에 속한다. 그동안 함안이 아라가야이기 때문에 옆에 있는 의령도 아라가야가 아닌가 의심했지만 이 지도를 보면 의령이 대가야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성주 성산가야, 창녕 비화가야, 함안 아라가야, 김해 금관가야, 고성 소가야, 고령 대가야.
왕국의 소재지로부터 합천 다음으로 의령이 가깝다. 거리로만 따진다면 의령은 그 시대에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대가야의 제련로
대가야의 제련로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길쭉한 원통모양이었다. 노벽은 높은 온도를 견디기 위해 진흙, 모래, 짚을 섞어 벽체를 만든 후 점토로 보강하였다.
철을 만드는 제련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송풍이었다. 송풍장치에는 사각상자 모양의 풀무와 가죽주머니, 송풍관이 있다.
송풍관은 송풍장치와 노 내부를 연결하는 것이다. 'ㄱ'자와 'ㅡ'자 모양의 원통관 여러개를 연결하여 사용한다.
지산동 73호분은 대가야 왕릉 출현기에 만들어진 '최초의 왕릉'이었다.
무덤 속에는 장신구, 무기, 말갖춤, 토기, 축소모형철기 등 화려한 껴묻거리가 출토 되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미니어처를 만들어 부장에 사용했다고 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순장했다고 하면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미니어처 부장품을 만들었던 사람은 먹고 살기도 바쁜데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현대사회에서 용돈으로 미니어처를 사서 수집하는 일과 그 시대에 있어서 껴묻거리로서의 부장품을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일 것이다.
무덤 내부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전쟁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므로 무기에는 당시의 첨단기술이 집약되었다.
무기는 전투뿐만 아니라 권력의 상징물로 이용되었다. 공격용 무기는 고리자루큰칼, 쇠창, 화살촉 등이 있다.
고리자루큰칼은 화려한 용이나 봉황으로 장식하였다. 쇠창은 나무자루를 꽂아 사용했으며, 화살촉은 다발로 묶여 있기도 한다. 방어용 무기인 갑옷과 투구는 신라보다 가야에서 많이 나온다. 갑옷은 판갑옷과 비늘갑옷이 있으며 투구의 형태도 다양하다. 판갑옷과 타원형 투구는 보병용으로, 비늘갑옷과 철판투구는 기병용으로 생각된다.
벌초한지 얼마되지 않은 고분인 모양이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이다.
지산동고분군의 순장은
거대한 왕릉이 출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고분에서 순장을 판단하는 기준은 한 봉토분 안에 2기 이상의 덧널이 있을 경우 동시에 만들어져야 하고, 강제성이 보여야 하며, 주인공과 순장자 사이에 신분적 차이인 종속성이 있어야 한다.
순장은 으뜸돌방 내에 무덤 주인공의 머리 위와 발치 아래에, 딸린돌방의 껴묻거리와 함께, 순장덧널을 별도로 만들어 매장하는 방식 등 다양하다.
순장덧널은 적게는 1기에서 많게는 32기나 되며, 순장자도 한사람에서 40여 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순장자에게 별도의 순장덧널을 만들어주는 것이 대가야 순장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를 '대가야식 순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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