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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고려동 유적지

by 1004들꽃 2016. 11. 24.

군북에서 가야로 가는 국도를 다니며 자주 보았던 고려동유적지라는 안내판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도착해 보니 기와집, 전주의 한옥마을을 연상시키는 기와집들이 모여 있었다. 관리는 되지 않아 풀이 많이 나 있었고 인적은 드물었고 택배 차량이 한 대 들어왔다가 나갔고 가끔 개 짖는 소리만 들려왔다.


유적지의 위쪽에는 전략적으로 조성한 전원주택지가 모여있다. 유적지의 주택은 요즈음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불편할 것 같고 시대에 맞도록 고쳐서 잘 정비해 놓으면 찾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 안을 보니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서 일을 하고 계시다. 이런 집들은 직장을 퇴직한 사람 중 희망하는 사람을 모집해서 관리를 맡기면 건축 수리는 하지 못할 지라도 전반적인 청소나 사소한 부분의 관리는 될 것 같다. 이 유적지를 군에서 관리를 하는지 개인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일매일 관리하지 않으면 풀밭이 될 것 같다. 집안의 제멋대로 자라난 풀밭의 광경은 집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고려동 유적지는 경남기념물 제56호로 1983년 8월 2일 지정됐다. 면적 8,842㎡이다.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이다. 이오 선생은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 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 하였다.


이오는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다. 또 아들에게도 새 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이며,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자손들은 19대 60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살았다. 벼슬보다는 자녀의 훈육에 전념하여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고려동 유적지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고려전답, 자미단(紫薇壇), 고려전답 99,000㎡, 자미정(紫薇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亭) 등이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이곳을 1983년 8월 2일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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